2017년 의학저널 ‘랜싯(The Lancet)’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2030년 한국 여성의 기대수명이 세계 최초로 90세를 넘길 것이라고 한다. 이는 세계보건기구와 영국 임페리얼컬리지 런던 연구팀이 OECD 35개 회원국 대상으로 수명을 분석한 결과로, 한국 남성 또한 기대수명이 84.07년으로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백년간 한국인의 키가 폭풍 성장했다면 약 12년 후에는 한국인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대수명을 자랑한다는 이야기다. 기대수명이 늘어나는 가운데 한국 노년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진다.
사이즈코리아로 살펴본 노년의 체형 변화
노년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현상이 바로 체형의 변화다. 체형 변화는 사실 신체적 쇠퇴라 봐도 무방하다. 노화는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시작되는데, 20세부터 인간의 뇌세포는 매년 수백만 개씩 죽기 시작하며 25세 이후부터는 뼈에서 칼슘이 빠져나간다.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눈에 띄는 신체적 노화는 40세 이후 나타난다. 흰머리가 나고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며 피부는 탄력이 줄어들고 주름이 생긴다.
한국인의 인체치수를 측정하고 표준정보를 구축하는 사이즈 코리아의 자료를 살펴보면, 여성의 경우 나이가 들수록 키는 줄고 가슴둘레와 허리둘레 등은 점차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근육은 줄어들고 피하지방의 분포가 변화하여 얼굴과 다리의 지방은 감소하고, 배와 엉덩이의 지방은 증가하여 ‘근감소성 비만(sarcopenic obesity)’ 경향이 나타난다. 특이한 점은 과거와 비교해 노년의 체형 변화 속도가 매우 느려지고 있으며, 이 또한 개인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2014년 사이즈코리아 사업 일환으로 실시한 고령자 3차원 인체형상 측정조사 결과를 보면 이 같은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이 측정사업에 참여한 필자는 70세부터 85세까지 고령자 분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80세를 전후하여 개인 간 체형 변화의 추이가 매우 다양함을 체감했다. 영양 섭취와 규칙적 운동 등 개인의 건강관리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 명랑하고 적극적인 성격 등이 체형 변화에 주요 변수로 작용함을 알 수 있었다.
패션, 노년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
노화는 사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인간이 맞게 되는 매우 자연스런 변화다. 와인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향기와 맛이 그윽해지듯, 인간 또한 나이가 들면서 신체는 늙지만 정서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성숙한 아름다움을 풍길 수도 있다. 이 같은 노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바로 패션이다.
옷은 나이든 몸과 마음에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훌륭한 도구 중 하나다. 옷은 그 자체로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다고도 한다. 영국 하트퍼드셔 대학 카렌 파인(Karen Pine) 교수는 슈퍼맨 티셔츠를 입은 학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은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옷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과정과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 바 있다.
▲ 빨간모자협회(Red Hat Society) © KoreaFashio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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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인 제니 조지프(Jenny Joseph)는 ‘놀라지 마세요’라는 시에서 ‘나이가 들면 저는 보라색 옷을 입을 겁니다. 거기다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는 빨간 모자를 쓸 거예요’라고 노래했다.
미국의 평범한 여성 수 앨런 쿠퍼(Sue Ellen Cooper)은 이 시를 읽고, 55세 생일을 맞은 친구에게 빨간 모자를 선물하며 ‘나이가 들어도 주위 눈치 보지 말고, 더 많이 웃고 즐겁고 활기차게 살아가자’고 다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앨런과 그의 친구들은 빨간 모자와 보라색 옷을 입는 모임을 시작했다. 이는 입소문을 타고 확산되어 50세 이상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빨간모자협회(The Red Hat Society)’라는 조직으로 발전했고, 현재 30개국의 2만개 이상 클럽이 가입한 국제적인 여성 단체가 되었다.
빨간모자협회가 사적인 모임에서 국제적인 단체로 성장한 이유는 옷이 가진 힘에서 찾을 수 있다. “길을 다닐 때 아무도 제게 눈길도 주지 않았고 저는 사회로부터 분리된 퇴물처럼 느껴졌어요. 나이가 들어가며 점차 투명인간이 되어 가는 것 같았죠. 하지만 빨간 모자를 쓰고 나가자 사람들이 미소를 띠고 먼저 인사하거나, ‘어디 좋은 모임에 가시나 봐요?’라고 말을 걸어주더군요. 그러면 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죠. 멋진 모임에 간다고.” 빨간모자회원 중 한 사람이 전하는 말은 패션의 힘을 실감케 한다.
▲ 기네스북 최고령 모델 카르멘 델로피체, 92세 한국인 최고령 모델 박양자 씨 © KoreaFashio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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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노년을 위하여
패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노년의 사례는 사회적 기업 ‘뉴시니어라이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뉴시니어라이프는 패션디자이너 출신의 구하주 대표가 설립한 기업으로 중노령층을 위한 실버패션쇼를 기획했다. 2007년을 시작으로 2,000여 명의 시니어모델을 배출했으며, 국내는 물론 독일, 네덜란드, 중국, 일본, 미국 등의 초청공연까지 포함해 총 158회의 패션쇼를 진행했다.
패션쇼를 통해 마음에 드는 옷을 입은 사람들은 자신의 멋진 모습을 보고 자신감을 얻는다. 그것은 곧 ‘스스로 아직 살아있다’는 울림으로 이어진다. 2007년 뉴시니어라이프 1기 실버모델로 선발되어 아흔이 넘은 현재까지 다채로운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한국인 최고령 모델 박양자 씨와 194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기네스북 최고령 모델 카르멘 델로피체(Carmen Dell'Orefice)는 패션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증거다.
▲ 미국의 사진작가 아리 세스 코헨은 사진집 ‘어드밴스드 스타일’ © KoreaFashio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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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진작가 아리 세스 코헨(Ari Seth Cohen)은 사진집 ‘어드밴스드 스타일’을 통해 평균 나이 75세, 멋쟁이 노년의 옷차림을 소개한다. 세월만큼 깊은 철학이 담긴 노년의 이야기도 함께 실려 있는데, ‘나이가 들수록 더 멋있을 수 있다’는 작가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나이는 물론 인체 치수 또한 숫자에 불과할지 모른다. 개인의 건강관리에 따라 체형 변화 속도가 더뎌짐을 거론하지는 않더라도, 삶에 대한 열정과 의지는 멋진 노년, 젊은 노년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에 인간의 마음에 깊은 영향을 주는 패션은 노년의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줄 것이다.
▲ 남윤자 서울대학교 의류학과 교수 / 생활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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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자 서울대학교
의류학과 교수
생활과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