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제주)의 의복 및 섬유생활문화 ⑤

박원호의 섬유역사산책-9◈ 조선시대 때 탐람(제주)의 의복 및 섬유생활문화를 더듬어보다
KoreaFashionNews | 입력 : 2017/01/12 [14:42]
▲ 이수길 전주이씨병와공파종회 고문이 이형상 선생이 제주 목사 시절 제주도를 기록한 탐라순력도를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20대손이다.     © KoreaFashionNews

 

 

◈ 조선시대 때 탐람(제주)의 의복 및 섬유생활문화를 더듬어보다

 

◎ 탐라(제주) 찬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1397년 조선 태조 6년 3월 8일 신유, 권근(權近)이 지은 시(詩)에, 탐라(耽羅)는 “창창(蒼蒼 ; 푸르고 푸루다)한 1점(一點)의 한라산(漢羅山)이 / 아득하고도 아득히 멀리있는 드넓은 물결 사이에 우뚝 솟아 있네 / 사람이 성망(星芒 ; 별빛)을 따라 움직여서 바다 나라에 이르니 / 마(馬 ; 말)는 천한(天閑 ; 하늘 사이)에 들어가서 용(龍)의 종(種 ; 씨)을 받아들여 태어낫다오 / 땅이 비록 치우쳐져 있으나 백성들은 오히려 거기서 업(業 ; 일)을 찾아 살아가고 / 바람이 편하면 상범(商帆 ; 상선. 장삿배)이 근근히 오고가고 / 성대(聖代 ; 성스러운 시대)가 이르러 판적(版籍 ; 호적)을 다듬어 직방(職方 ; 나라의 벼슬지리)을 꾸밀 때 / 비록 그 방(邦 ; 고을. 나라)이 멀고 거칠더라도 부디 빠뜨리지 마시옵소서”라고 하였다.

 

◎ 명(明)나라가 탐라(제주)의 동불상(銅佛像)을 요구하다


1400년 조선 정종 2년 9월 16일 정축, 제주(濟州)에 거주하고 있던 백백태자(伯伯太子 ; 1382년 고려 우왕 8년 7월 탐라로 망명한 원나라의 운남 양왕의 아들)가 환자(宦者 ; 환관)를 보내어 말 3필(三匹)과 금환(金環 ; 금가락지)을 바쳤다.


<백백 태자(伯伯太子) : 고려 말에 제주(濟州)로 망명한 원나라 왕족. 원나라의 운남(雲南) 양왕(梁王)의 아들로, 1382년(우왕 8) 7월 탐라로 망명하였다. 이후 양왕의 자손들이 명에 의해 제주로 유배되자 그들과 같이 거처하였다>

 

◎ 성주(星主)와 왕자(王子)의 명칭을 고치다


<1402년 조선 태종(太宗) 2년 임오, 성주(星主 ; 임금) 고봉례(高鳳禮)와 왕자(王子) 문충세(文忠世) 등이 성주와 왕자의 호(號)가 지나치게 참의(僭擬 ; 분수에 넘치다. 주제 넘다)한 것 같다고 하면서 고치기를 청(請)하였으므로, 성주를 일러 좌도지관(左都知管)으로, 왕자를 일러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하였다. ; 세종실록 지리지>


1403년 조선 태종 3년 윤11월 19일 임술, 사간원(司諫院)에서 상소(上疏)하여 부(府), 주(州), 군(郡), 현(縣)의 이름을 정하자고 청하였다. 그 상소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의주(義州)는 의순(義順)으로 고치고, 안주(安州)는 안흥(安興)으로 고치고, 길주(吉州)는 길안(吉安)으로 고치고, 강릉(江陵)은 예전대로 하고, 제주(濟州)는 탐라(耽羅)로 고치어, 5대도호부(大都護府)를 삼으소서. 위의 5부(府)는 모두 국경(國境)의 거진(巨鎭)이니, 마땅히 도호부로 칭하여 군민(軍民)의 책임을 겸하여 맡게 하소서.”


1404년 조선 태종 4년 10월 4일 임신, 명(明)나라 내사(內使) 황엄(黃儼), 양영(楊寧), 한첩목아(韓帖木兒), 상보사(尙寶司) 상보(尙寶) 기원(奇原) 등이 이르니, 산붕(山棚)을 맺고 나례(儺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시복(時服) 차림으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반송정(盤松亭)에 나가서 백희(百戲)를 베풀고 맞이하여 경복궁(景福宮)에 이르렀다. 명(明)나라의 칙(勅 ; 칙서)에 이르기를, “짐(朕)이 선황고(先皇考), 황비(皇妣)의 은덕(恩德)을 거듭 생각하여 천양(薦揚)하는 제전(祭典)을 거행하고자 하여, 특별히 사례감(司禮監) 태감(太監) 황엄 등을 보내어, 그대 나라와 탐라(耽羅)에 가서 동불상(銅佛像) 수좌(數座)를 구하게 하니, 잘 도와서 성사시켜 짐(朕)의 뜻에 부응(副應)하도록 해주시오”라고 하였다.

 

▲ 탐라순력도는 1702년(숙종28)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한 이형상<사진>이 제주관내 순시를 비롯해 한 해 동안 거행했던 여러 행사 장면을 제주목 화공 김남길로 하여금 40폭의 채색도로 그리게 한 다음 매 화폭의 하단에 간결한 설명을 적고, ‘호연금서’라는 이름의 그림 한 폭을 곁들여 꾸며진 총 41폭의 화첩이다. 18세기 초 제주도의 관아와 성읍, 군사 등의 시설과 지형, 풍물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제주도의 역사연구에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순력도’라는 이름의 기록화로는 거의 유일하게 현존하는 소중한 화첩이다. 그 진본을 이형상의 후손들이 간직해오다가 1998년 12월부터 제주시가 소장하고 있다. © TIN 뉴스

 

1406년 조선 태종 6년 4월 20일 경진, 황엄 등이 친히 제주(濟州)에 가서 동불상(銅佛像)을 맞이하려 하니, 혹자가 말하기를, “명(明)나라 황제가 황엄 등으로 하여금 탐라(耽羅)의 형세를 보게 함은 분명 다른 뜻이 있어서 일 것이다”라고 하니, 임금이 걱정하여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급히 선차(宣差) 김도생(金道生)과 사직(司直) 박모(朴模)를 보내어 제주에 급히 가서, 법화사(法華寺)의 동불상(銅佛像)을 가져 오게 하였으니, 대개 만약 불상이 먼저 나주(羅州)에 이르면, 황엄 등이 제주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하기 때문이었다.


1406년 조선 태종 6년 5월 25일 갑인,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광(李匡)을 보내어 전라도에 가게 하였다. 예조 판서 이문화(李文和)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서역(西域)의 한 승려가 명(明)나라 경사(京師 ; 서울)에 이르렀는데, 명(明)나라 황제가 생불(生佛)이라고 하여, 천관(千官)을 거느리고 관대(冠帶)를 하고 교외까지 마중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흠차관(欽差官) 등이 탐라(耽羅)의 동불(銅佛)을 받들고 경(京 ; 서울)으로 들어오는 날, 전하(殿下)도 또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조복(朝服)을 갖추고 교외까지 마중하여, 천자(天子)를 위해 존경(尊敬)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1410년 조선 태종 10년 3월 2일 무진, 사헌부(司憲府)에서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등의 죄를 청하여 상소하였다. 그 내용 중에 “저 탐라(耽羅)란 곳은 멀리 바다 밖에 있어 군사와 말이 정강(精强)하니, 인심(人心)이 반드시 다를 것입니다. 만일 민무구 등이 오랫동안 그곳에서 당원(黨援)을 맺어 험하고 견고함을 믿어 하루아침에 변고를 일으킨다면, 전하께서 장차 어떻게 제재하시렵니까”라고 하였다.


1414년 조선 태종 14년 7월 19일 경인, 전(前) 사헌감찰(司憲監察) 권도(權蹈) 등 25명에게 급제(及第)를 내려 주었다. 권도를 사간원우헌납(司諫院右獻納)으로 삼고, 권도와 이수(李隨), 고득종(高得宗)에게 궁온(宮醞 ; 술 이름)을 각각 40병(四十甁)씩 내려 주었으니, 이수는 량(兩) 대군(大君)의 스승이었고, 고득종은 탐라(耽羅)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하사(下賜)가 있었다.


1416년 조선 태종 16년,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목(濟州牧), 정의현(旌義縣), 대정현(大靜縣) 등 3읍제(邑制)를 실시하였다.

 

▲ 산방배작 - 1702년(숙종 28) 11월 10일, 산방굴에서 배작의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돌산인 산방산의 모습이 기골이 웅장하게 묘사되어 있다. 송악산, 형제도, 군산, 감산, 용두 등이 보이며, 도로, 산방연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사계리 포구가 흑로포로 표기되어 있다. 산방산 남쪽을 휘감은 도로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도로다. 현재 산방산 입구에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는 노송이 이 그림에서도 노송처럼 그려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수령이 400년은 족히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TIN 뉴스

 

◎ 세금제도 정비와 말 사육 방법을 건의하다


1419년 조선 세종 1년 7월 13일 병진, 나주(羅州) 교수관(敎授官) 진준(陳遵)이 글을 올리니, 대략 이르기를, “제주가 멀리 바다 가운데에 있어, 여러 번 풍재(風災)가 있었고, 해마다 자주 기근(飢饉 ; 굶주리다. 흉년)이 들어, 유사(有司 ; 벼슬아치. 담당자)가 급한 것을 고하면, 매번 국가(國家)가 깊이 염려해서 미(米 ; 쌀)를 운반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진(賑 ; 진휼. 구제)하게 되니, 이것은 그 땅이 조(租 ; 조세. 벼세금)를 걷는 법(法)과 진휼(賑恤)하는 준비가 아직 없는 때문입니다. 신(臣)이 일찍이 판관(判官)이 되어. 마침 기근을 만나 쌀 1천석(千石)으로 진휼하여 구제하였는데, 호구(戶口)가 너무 많아서 이것도 오히려 충분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지금의 500석(五百石)만으로서야 어찌 해야 됩니까. 현실에 구제하기 위한 시급한 계책으로는, 공(公 ; 나라. 관)에서 전조(田租 ; 조세. 세금)만 받아, 뜻하지 않은 환난에 대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삼가 살피건대 밭을 개간하며 2만여결(二萬餘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옥요(沃饒 ; 비옥하여 산출이 많다)한 밭은 그 토인(土人 ; 지방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서 경작하고 심어서, 자기들의 사유로 나누어 만들고, 세력이 강한 자는 겸병까지 하는데, 사람을 사서 시켜서 갈고 심게 하여, 조(租 ; 벼세금)를 자기에게 바치게 하여서, 그 이익은 독차지하면서도 공(公 ; 나라. 관)에서는 참여하지도 못하게 하니, 이것은 참으로 맥도(貊道 ; 맥나라의 법률. 20분 1의 세금. 조선은 10분의 1)만도 못합니다. 그 임자가 없는 빈 땅은 밭 없는 자가 분(糞 ; 분뇨. 거름)을 써서 경작하는 것을, 관(官 ; 나라)은 한전(閑田)이라고 하여, 조(租, ; 조세)를 걷어서 관의 비용으로 쓰고 있으니, 다 같이 제주의 토지(土地)와 인민(人民)으로서, 고르지 못한 것이 이와 같은데, 더욱이 관에서 거둔 조세도 국용(國用 ; 국가의 소용)이 되지 못하고 있아옵니다. 신(臣)의 생각으로는, 본조(本朝)의 전제(田制)에 의하여, 타량(打量 ; 수량을 계산하다. 계량)하여서 관에서 받아들이되, 만약 땅이 험하거나 막혀 있는 데가 많아서, 타량하기가 어려우면, 또한 마땅히 본토(本土)에서 조세 받는 예에 의하여 관에서 받아들이고, 그 본토에서 조세 받는 것도 화(禾 ; 벼)의 성숙(成熟 ; 익다)한 정도를 상중하(上中下)의 3등(三等 ; 등급)로 나누어서, 종(種 ; 볍씨. 씨앗) 1두(一斗 ; 1말)를 뿌린 밭을 기준으로, 연등(年登 ; 연간 수확량)이 상숙(上熟 ; 1등급)이면 조(租 ; 벼) 3두(三斗)를 징수하고, 중숙(中熟 ; 2등급)이면 2두(二斗), 하숙(下熟 ; 3등급)이면, 1두(一斗)로 하면 될 것입니다. 가령 그 볍씨가 1천석(千石)이라 하고, 비록 모두가 하숙(下熟)이라 하여도 그 수가 천석(千石)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제주의 토지가 어찌 전부 천석지기에만 그칠 수 있겠습니까. 수년(數年)만 계속하여 쌓으면, 만석으로 늘어날 것이니, 거리의 원근을 헤아려 보고, 백성이 거주하는 밀도를 잘 살펴서, 곳에 따라서 창고(倉庫)를 나누어 세워 주어, 시기에 맞추어서 거둬들이고 내어주면 백성도 먹기 어려운 근심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혹시 기황(飢荒 ; 흉년)을 만난다 하여도, 쌓아 둔 곡식의 기본량이 있어서, 나라에서는 속(粟 ; 조. 곡식)을 운반할 노력이 필요 없고, 백성은 그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제주(濟州)는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은 조밀하여서, 농사와 누에치기에는 힘쓰지 않고, 수륙(水陸)의 소산(所産)으로써 상판(商販 ; 상품을 팔다. 상업. 장사)하여서만 생계를 삼고 있으므로, 전조(田租 ; 밭의 조세)를 받을 것이 없다고 하나, 제주는 옛적에 탐라국(耽羅國)이라 일컬어서, 신라국(新羅國)과 함께 같은 때에 세워졌는데, 어찌 세금받는 법도 없이 능히 나라를 다스렸을 것입니까? 경자(頃者 ; 일전에. 요즈음)에 합적초(哈赤肖), 고독불화(古獨不花), 석가을비(石加乙非) 등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모반하매, 주즙(舟楫 ; 선박)이 통하지 못한 지가 30여년이나 되었으니, 그때에 어찌 안전하게 장사로 생활을 꾀하는 자가 있었겠습니까. 또 전조(前朝 ; 고려)에 이르러서도 죄(罪)를 성토하고 배반한 자를 토벌하여, 그 괴수를 잡았을 뿐이었고, 전제(田制 ; 토지 제도)를 개정(改正)할 겨를이 없어, 그냥 인순(因循 ; 옛날 관습)하여 오다가 오늘에 이른 것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옛적에 장횡거(張橫渠)가 정전(井田 ; 정전법)을 시행하고자 할 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세상에서 이 법을 시행하기 어렵다고 근심하는 것은, 언제나 부인(富人 ; 부자)의 밭을 전부 빼앗아 들이는 일만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 자가 없다라고 하더니, 이제는 어떤 자도 또한 다 토관(土官 ; 본토의 관원)이 가지고 있는 밭에 대하여, 조세 받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자는 적고 빈자는 많으며, 이 법이 행하여지면, 기뻐할 자는 많을 것이니, 어찌 행하기 어려움을 근심하겠습니까. 마(馬 ; 말) 또한 군국(軍國 ; 군대)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지금까지는 산림(山林)에 놓아 제 천성대로 자라게해서 사람에게 길들여 익히지 않게 하였다가, 일조(一朝 ; 하루아침)에 갑자기 끝으로 붙들어 매어서 후풍(候風)하는 곳에 모아, 여러날 주리고 목마르게 하다가, 선(船 ; 선박. 배)에 실려서 바다를 건너게 하면, 바람과 물이 각각 다른지라, 목이 말라 물을 마시다가 질병이 나면, 못쓰는 말이 되어, 나라에 무익한 것이니, 이제 각처(各處)에 마땅한 곳을 조사해서 구(廐 ; 마굿간. 목장)를 설치하여, 미리 길러서 겨울을 지나면, 거의 전일(前日 ; 앞의 일자)의 질병이 없어지고 다 실용(實用)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정부(政府)와 육조(六曹)로 하여금 의의(擬議 ; 의논)하여 올리라고 명하니, 모두 다 이르기를, “진언한 대로 하되, 토지의 계량은 금년 가을을 기다려 하고, 조세(租稅)는 오는 경자년(庚子年)으로부터 시작하되, 동서(東西) 량계(兩界)의 예(例)에 의하여 거두어 들이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김녕관굴 - 1702년(숙종 28) 10월 30일, 김녕의 용암굴에 횃불을 들고 들어가는 그림이다. 이곳에서 말을 갈아타기 위해 잠시 머물며 김녕굴 안을 둘러보았던 모양이다. 굴의 높이 30척, 너비 20척, 길이 5리에 해당하는 굴이다. 오늘날의 사굴과 만장굴을 합해 김녕굴이라 했던 듯하다. 입산에 입산봉수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제주도에는 동굴이 많았지만 유독 김녕굴을 찾은 것은 이 굴이 오래 전부터 유명했기 때문인 듯하다. 용암동굴이면서도 석회동굴 못지않은 종유석과 석주, 석순 등 기이한 모습이 당시에도 볼만한 구경거리였던 모양이다. 가마를 타고 굴 안쪽을 관람하는 모습과 굴 바깥쪽에 우거진 팽나무가 잘 표현되어 있다. © TIN 뉴스

 

◎ 세종실록 지리지 제주목


<앞쪽 부분은, 앞서 게재한 ‘고려사 지리지’의 내용과 똑 같음으로 여기서는 중략한다>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1454년 발간) 전라도 제주목(濟州牧)에 의하면, 1402년 조선 태종(太宗) 2년 임오, 탐라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와 왕자(王子) 문충세(文忠世) 등이 성주와 왕자의 호(號)가 지나치게 참의(僭擬 ; 분수에 넘치다. 주제 넘다)한 것 같다고 하면서 고치기를 청(請)하였으므로, 성주를 일러 좌도지관(左都知管)으로, 왕자를 일러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하였다.


탐라의 진산(鎭山)은 주(州 ; 고을)의 남쪽에 있는 한라(漢拏 ; 한라산)이다. 한편으로는 두무악(頭無岳 ; 꼭대기가 없는 산), 또는 원산(圓山 ; 둥근 산)이라 한다. 그 고을의 관원이 제사를 지내는데, 궁륭(穹隆 ; 하늘쪽으로 둥그스름하다)하게 높고 크며, 그 꼭대기에는 큰 지(池 ; 저수지. 연못)가 있다. 탐라의 호(戶 ; 호수. 가구수)는 5천2백7호요, 구(口 ; 인구. 사람)는 8천3백24명이요, 군정(軍丁 ; 군인)은 2천66명이다.【마군(馬軍)이 843명이요, 보군(步軍)이 1천2백23명이다】

 

▲ 현폭사후 - 1702년(숙종 28) 11월 6일, 현재의 중문 천제연폭포에서 활 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대정 지경임을 표시하는 글자가 보이며 천제연폭포를 상폭과 하폭으로 구분해 놓고 있다. 폭포의 반대편에 과녁을 설치해 화살을 쏘고 있는데, 폭포의 좌우에 줄을 동여매고 그 줄을 이용해 추인(芻人:짚이나 풀로 만든 인형)을 좌우로 이동하게 했다. 이와 같은 추인은 주로 기병(騎兵)들의 화살을 쏘는 표적으로 주로 이용되었으나, 여기서는 과녁을 향해 쏜 화살을 상대편에서 추인에게 꽂으면 이쪽에서 줄을 당겨 추인에게 꽂힌 화살을 건네받는 것이다. © TIN 뉴스


토성(土姓 ; 성씨)이 고(高)씨, 양(梁)씨, 부(夫)씨요, 주요 인물(人物)로는 문하시랑(門下侍郞) 고조기(高兆基)가 있는데, 고려 의종(毅宗 ; 1146-1170년) 때 사람이다.


그 땅의 풍기(風氣 ; 기후)는 따뜻하며, 풍속이 미욱하고 검소하다. 간전(墾田)이 3천9백77결(結)이요,【수전(水田 ; 물밭. 논)이 31결이다】 토의(土宜 ; 알맞은 농산물)로는, 산도(山稻 ; 밭벼)를 비롯하여 서(黍 ; 기장. 조), 직(稷 ; 피. 기장. 조), 숙(菽 ; 콩), 교맥(喬麥 ; 메밀), 모맥(麰麥 ; 보리) 등이다. 토공(土貢 ; 조공으로 바치는 토산물)으로는, 대모(玳瑁 ; 바다거북이), 표고(蔈膏 ; 기름이름), 우모(牛毛 ; 소의 털), 비자(榧子 ; 나무열매이름), 감자(柑子 ; 나무열매이름. 감귤), 유자(柚子 ; 나무열매이름), 유감(乳柑 ; 나무열매이름), 동정귤(洞庭橘 ; 나무열매이름), 금귤(金橘 ; 나무열매이름), 청귤(靑橘 ; 나무열매이름), 산귤(山橘 ; 나무열매이름), 전포(全鮑 ; 전복. 물고기이름), 인포(引鮑 ; 물고기이름), 퇴포(槌鮑 ; 물고기이름), 조포(條鮑 ; 물고기이름), 오적어(烏賊魚 ; 물고기이름. 오징어), 옥두어(玉頭魚 ; 물고기이름. 옥돔), 곤포(昆布 ; 바닷물풀이름. 다시마), 산유자목(山柚子木 ; 나무이름), 이년목(二年木 ; 나무이름), 비자목(榧子木 ; 나무이름) 등이 있다. 량마(良馬 ; 말이름. 좋은 말)가 난다, 약재(藥材 ; 의약재료)로는, 진피(陳皮 ; 오래 묵은 귤 껍질), 산약(山藥 ; 마 뿌리), 석곡(石蔛 ; 골풀이름), 초곡(草蔛 ; 골풀이름), 천련자(川練子 ; 소태나무열매), 백지(白芷 ; 구리대뿌리), 팔각(八角 ; 풀이름), 령릉향(零陵香 ; 풀이름), 오배자(五倍子), 치자(梔子 ; 치자나무열매이름), 향부자(香附子 ; 풀이름), 목과(木瓜 ; 모과), 시호(柴胡 ; 풀이름. 미나리과), 청피(靑皮 ; 푸른 귤의 껍질), 백편두(白扁豆), 초오두(草烏頭), 해동피(海東皮 ; 엄나무껍질), 후박(厚朴 ; 나무이름), 오어골(烏魚骨 ; 오징어뼈), 두충(杜沖 ; 나무이름), 만형자(蔓荊子 ; 순비기나무열매), 석결명(石決明 ; 풀이름), 반하(半夏 ; 끼무릇뿌리), 황국(黃菊 ; 국화이름), 록용(鹿茸), 박상(舶上), 회향(茴香 ; 풀이름), 지각(枳殼 ; 탱자나무 껍질) 따위가 있다. 읍석성(邑石城 ; 고을의 돌성)의 주회(周回 ; 둘레)는 910보(九百十步)이다.


읍석성(邑石城)【둘레가 9백 10보이다】 봉화(烽火)가 9처(九處 ; 곳)에 있는데, 주(州 ; 고을)의 ·동문(東門)【동쪽으로 별도에 응한다】, ·별도(別刀)【동쪽으로 원당에 응한다】, ·원당(元堂)【동쪽으로 서산에 응한다】, ·서산(西山)【동쪽으로 입산(笠山)에 응하고, 또 동쪽으로 정의현(旌義縣) 지말산(只末山)에 응한다】, ·남문(南門)【서쪽으로 도도리산에 응한다】, ·도도리산(道道里山)【서쪽으로 수산에 응한다】 ·수산(水山)【서쪽으로 고내에 응한다】 ·고내(高內)【서쪽으로 곽산에 응한다】 ·곽산(郭山)【서쪽으로 판포산(板浦山)에 응하고, 또 서쪽으로 대정현(大靜縣) 차귀산(遮歸山)에 응한다】 등이다. 탐라 목장(牧場)에는 말이 3천3백52필이 있다.


령이(靈異 ; 신령한 일)한 로는, 1002년 고려 목종(穆宗) 5년 임인 6월, 탐라산(耽羅山)에 4공(四孔 ; 4구멍)이 열려서, 적수(赤水 ; 시뻘건 물)이 치솟아 올랐고, 1007년 고려 목종 10년 정미에는 바다 가운데에서 산(山)이 솟아나왔다. 탐라(耽羅)에서 보고하니, 임금이 태학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가서 조사하게 하였다.


탐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솟아나오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고, 벼락치는 것 같이 땅이 움직였습니다. 무릇 7주야(晝夜 ; 7일의 낮과 밤)가 지나서야 비로소 개었는데, 산에는 풀과 나무가 없고, 연기만이 그 위를 덮고 있었읍니다. 바라다 보니, 석류황(石流黃) 같기도 하여 사람이 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전공지가 몸소 산 아래에까지 나아가 그 모양을 그려서 나라에 바쳤다.


또 속설(俗說)에 전하기를, 한라산(漢挐山) 주신(主神)의 아들 계제(季弟)가 살아서는 거룩한 덕(德)이 있었으므로, 죽어서는 명신(明神)이 되었는데, 마침 호종단(胡宗旦 ; 송나라 사람)이 이 땅을 진무(鎭撫 ; 진압하다. 빼앗다)하려는 제사를 지내고 나서 배를 타고 강남(江南 ; 양자강 남쪽)으로 떠나려 할 때, 신(神)이 응(鷹 ; 매)로 화(化 ; 변화. 변신)하여 날아가서 그 배 장두(檣頭 ; 돛대 꼭대기)에 올라 앉았는데, 조금 있다가 북풍(北風)이 크게 불어 호종단의 배가 격쇄(擊碎 ; 부수어지다. 난파)되어 서쪽 국경인 비양도(飛揚島)의 암석(巖石) 사이에서 침몰하였다. 나라에서 그 신령함을 기리어 포상하여 식읍(食邑)을 하사하고, 광양왕(廣壤王)으로 봉하였는데, 해마다 나라에서 향(香)과 폐백(幣帛)을 내려서 제사를 지낸다.

 

▲ 건포배은 - 1702년(숙종28) 12월 20일, 향품문무 300여 명이 관덕정 앞과 건입포에서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은혜에 감사하는 절을 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배례장면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유난히 서늘해 보이는 한라산과 성 밖 각 마을에 있는 신당들이 불타고 있는 장면이다. ‘건포배은’과 ‘신당파괴’ 두 사건을 한 도면에 표현한 것이다. 그림 아래에는 불에 타 없어진 신당이 129곳, 훼손된 사찰이 5곳이며, 285명의 무격(남녀무당)을 농업으로 돌려놓았다고 적고 있다. © TIN 뉴스

 

◎ 제주, 일본국의 침범 도모로 힘들어 하다


1477년 조선 성종 8년 10월 25일 기미, 병조참판(兵曹參判) 박건(朴楗)이 차자(箚子 ; 상소문)를 올리기를, “제주(濟州)의 3읍(邑)은 본래 탐라(耽羅)의 유종(遺種)인데, 대개 성화(聖化)가 외방에 미치지 않는다고 하여, 의(義)를 사모하여 정성을 바쳐 왔으므로. 우리의 판적(版籍 ; 호적)에 넣었던 것입니다. 1467년 조선 세조 13년 정해년부터 진주(晉州), 사천(泗川), 고성(固城), 흥양(興陽)에 와서 우거(寓居)하는 자가 300여구(口 ; 명)에 이르고, 그 밖에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제주(濟州)는 해물(海物 ; 해산물)이 많이 나는 곳인데, 그 많이 나는 곳을 버리고 다른 지방에 얹혀서 사는 것은 부(賦 ; 부세. 세금)를 도피할 계책이 있지 않으면 반드시 물건을 노략질할 음모(陰謀)가 있는 것입니다. 부세를 도피하거나, 물건을 노략질하는 것은 모두 성화를 막는 큰 죄인 것이니, 징계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극한 은휼(恩恤)을 더하시니, 어찌 감사한 줄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인순(因循 ; 구습)을 버리지 못하고, 검찰할 줄을 알지 못한다면 역(役 ; 구실)을 피(避)하고, 부세를 도피하려는 백성들이 이것을 본받아서 그치지 아니할 것이니, 그 폐단은 장차 구제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대저(大抵) 무항산자(無恒産者 ; 일정한 생업이 없는 자)는 무항심(無恒心 ; 일정한 마음을 갖지 못하다)인데, 제주(濟州)에서 육지로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은 농업(農業)을 일삼지 아니하고, 오직 어렵(漁獵 ; 물고기잡이)만을 일삼으니, 대저 풍랑(風浪)의 사이에서 물고기잡이를 하더라도 반드시 많이 잡을 수는 없으므로, 만약 이득을 얻지 못하면 백성들을 침탈게 되는데, 형세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소재지의 벼슬아치로 하여금 밭을 주게하여서 농경하기를 권장하게 하고, 감사(監司)가 그 실적(實跡)을 고핵(考覈)하여서 아뢰도록 하소서.

 

▲ 우도점마 - 1702년(숙종28) 7월 13일, 우도 목장 내에 있는 말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하단에 말은 262필이며 이들 말을 관리하는 목자, 보인의 수가 23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도(牛島)는 ‘쉐섬’의 한자 차용 표기다. 제주에서는 소를 ‘쉐’라고 부른다. 동두(東頭)는 ‘동머리’의 한자 차용 표기로, 우도의 ‘쉐머리오름’을 이른다. 이름 그대로 이 쉐머리오름을 머리로 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그림 역시 우도의 모습을 마치 소가 누워있는 듯이 묘사하고 있다. 우도의 지명이 소가 누워있는 모습 같아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이를 그림으로까지 형상화한 점에서 과거 조상들의 독특한 지형인식을 엿볼 수 있다. © TIN 뉴스


또 그 배로 출입(出入)하는 것을 조사하여시 반드시 노인(路引 ; 길 증명서)을 상고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무휼(撫恤)하기를 더한다면 스스로 양민(良民)으로 화(化)할 것입니다. 또 백성들이 많이 유이(流移)하는데도 수령관(守令官)에 임명된 목자(牧者)가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니, 어찌 그 직분을 다한다고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또 듣건대, 제주(濟州) 사람으로서 여러 고을에 와서 우거(寓居)하는 자는, 수령(守令)이 고기잡이하는 것을 이롭게 여겨 조용히 자기 마음대로 하게 하고, 그 출입(出入)을 막지 아니하고 이사하는 것도 금지하지 아니하여, 백성들의 재물(財物)을 약탈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그 악(惡)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유이(流移)의 법(法)을 엄하게 세워서, 그 가는 고을과 이르는 고을에서 일일이 서로 보고하여 모름지기 즉시 쇄환(刷還)시키되, 만약 숨기고서 아뢰지 않는 자가 있으면 양쪽 고을의 수령(守令)을 물간사전(勿揀赦前 ; 은혜를 입지 못할 무거운 죄)인 것을 가리지 말고 아울러 모두 파출(罷黜)시키도록 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회보(回報)하지 아니하였다.


1478년 조선 성종 9년 10월 13일 신축, 공조판서(工曹判書) 양성지(梁誠之)가 상서(上書)하여 일컫기를,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제주(濟州)는 옛날 탐라국(耽羅國)입니다. 지방(地方)이 100리(百里)이며, 바다 밖에 멀리 있는데, 신라(新羅) 때에 비로소 내조(來朝)하였고, 고려(高麗)에 이르러서 나라를 없애고 현(縣)으로 만들었으며, 그 인구의 번성함과 물산(物産 ; 산물)의 풍부함은 내지에 있는 고을의 갑절입니다. 그러나 신이 보건대 역대(歷代)에 변고(變故)가 잇따라서 떨어졌다 합쳤다 한 것이 한 번이 아니었으며, 원(元)나라에서 목장(牧場)을 설치하자, 이로부터 말이 크게 번식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3읍(三邑 ; 3고을)을 설치함에 미쳐서 그 권세를 나누고 그 자제(子弟)를 등용하여 그들의 마음을 진압시켰으니, 열성(列聖)께서 먼 지방의 사람을 대우하는 것이 적당하였다고 이를 만합니다. 엎드려 듣건대 지난 가을에 왜선(倭船)이 고을의 경내에 와서 머무르자, 이에 왜국(倭國) 말을 아는 자를 보내어 후일에 대비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제주는 대마도(對馬島)의 여러 섬과 더불어 바다 위에 같이 있어 동서(東西)로 서로 바라보면서도 언어(言語)가 각각 다르니, 오히려 가하다고 이를 것입니다. 만약 말이 서로 통하면 이는 마치 노(猱 ; 원숭이)에게 나무에 오르기를 가르치는 것과 같으므로, 후일의 변(變)을 글로 다 쓸 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요즘 또 의심스러운 자취가 많이 있는데, 대우하기를 적당하게 하면 통역이 없을지라도 불가함이 없을 것이며, 만약 적당하게 하지 못하면 통역이 있는 것이 도리어 해가 될 것입니다. 헤아리건대 이제 통사(通事)의 행차가 아직 저쪽에 도달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 모름지기 역마(驛馬)를 급히 달려서 그 사람을 강제로 돌려보내고 왜(倭)와 가깝지 않은 사람으로 하여금 왜말을 익혀서 알도록 한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1512년 조선 중종 7년 2월 15일 경인, 안팽수가 아뢰기를, “고황제(高皇帝 ; 명나라 태조)께서 또한 우리나라 사신에게 이르기를, 탐라(耽羅)는 본래 달달(㺚狚 ; 달단. 타타르) 사람들로서 군신(君臣)의 분의를 잘 모르고, 오직 목양(牧養)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니, 국왕(國王)에게 말하여 잘 무마하도록 하라. 또한 왜인(倭人)들과 늘 상통하므로 제어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1541년 조선 중종 36년 1월 3일 경인, 제주목사(濟州牧使) 조사수(趙士秀)가 올린 계본(啓本)과 상소(上疏)를 정원(政院)에게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 상소를 보니 이 사람은 생각이 깊다. 어찌 우연(偶然)히 헤아려서 이렇게 썼겠는가. 의례(依例)적인 일로 계하(啓下)해선 안 되니. 의정부(議政府)가 합좌(合坐)하는 날 병조(兵曹)의 당상(堂上)도 같이 불러 의논하라. 목사(牧使)가 비록 무사(武士)는 아니라고 해도, 지금 개차(改差)할 수는 없다. 고단(孤單)함이 이와 같다면 조장(助將)과 군관(軍官)을 선발하여 보냄이 어떠하겠는가? 그곳의 활이나 화살 역시 그 수량이 적을 것이니, 지금 더 보내주는 것이 좋겠다. 아니면 별도로 계책을 세울 일은 없겠는가? 정부낭관(政府郞官)을 불러 이 뜻으로 대신(大臣)들에게 의논케 하라 하였다. 정원이 조사수의 상소를 등서(謄書)하여 입계하니, 전교하기를, 평상시의 소차(疏箚)라면 등서해 아뢰는 것이 통례이나 이 상소는 공사(公事)에 관계된 일이라 등서할 필요가 없으니 ‘계(啓)’ 글자를 찍어서 내린다”라고 하였다. 그 상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귤림풍악 - 망경루 후원 귤림에서 풍악을 즐기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순력 일정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림에 나타나는 열매의 색깔로 보아 과일이 익어가는 시기인 듯 하다. 귤나무들의 과일 색이 다른 것은 나무마다 품종이 다름을 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제주성 안에는 동과원, 서과원, 남과원, 북과원, 중과원, 별과원 등 6개 과원이 있었는데, 이 그림의 정경을 보면 왼편 아래쪽에 망경루, 그 오른쪽에 귤림당, 오른쪽에 교방(敎坊), 위편에 병고(兵庫)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북과원’이다. © TIN 뉴스


‘화(禍)란 어둡고 은미한 곳에 숨어 있기에 지혜로운 사람도 깨닫지 못하고, 일은 밝고 환한 곳에 드러나 있기에 어리석은 이라도 알 수가 있습니다. 신(臣)은 비록 지혜로운 이도 알기 어려운, 어두운 곳의 화에는 감감하지만 간혹 어리석은 자도 알 수가 있는 밝게 드러나 있는 일은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제주(濟州)는 바로 옛적의 탐라(耽羅)로 땅이 척박하고 백성들은 빈한하며, 고을의 주거지는 흩어져 있습니다. 3성(三城)의 조그마한 마을은 마치 그 모양이 둥근 활과 같은데, 장정 하나가 공격하여도 리(籬 ; 울타리)를 철거하기보다 더 쉽습니다. 평상시 군졸(軍卒)이라 불리는 사람도 수백명을 넘지 못하며, 더구나 그 가운데 활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열에 두 셋도 안 되는 형편입니다. 밖으로는 믿을 만한 세력이 없으며, 안으로는 방어할 만한 병사가 없습니다. 우도(牛島) 동편은 육지(陸地)가 저(渚 ; 물. 모래섬)로 이루어져 있고, 대정(大靜) 서쪽은 한빈(漢濱 ; 한강의 물가)처럼 평평합니다. 그래서 왜적(倭賊)들이 침략해 올 경우 1천소(千艘 ; 척)의 배도 정박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구가 침구해 오지 않은 까닭은 저들이 멀리서 지리의 험이(險夷)와 병사의 허실(虛實)을 측량하기 어려워서였던 것입니다. 지금 표류한 백성을 쇄환(刷還)해 오는 왜인이 마치 자기 집에 들어오듯 바로 노를 저어 들어와 정박하였습니다. 그런데 고을 관아에 유치(留置)하여 그들에게 이곳의 형세를 엿보게 하고 있으니, 이는 이른바 문을 열고 적을 끌어들여 땅을 적에게 내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옛날 진(普)나라 사람이 수극(垂棘)에서 나는 보물과 굴산(屈産)에서 나는 명마(名馬)를 가지고, 우(虞)나라로부터 길을 빌려 괵(虢)나라를 멸하고서는 열흘도 안 되어 우공(虞公)이 진(普)나라의 순식(荀息)에게 포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상대방의 달콤한 말과 후한 폐백에 혹하는 것이 고금의 공통된 걱정거리입니다. 왜노(倭奴)의 이번 일 또한 어찌 이것과 다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이 고을을 왕래(往來)할 때 도내의 모든 곳을 가리키며 원근(遠近)의 형세(形勢)를 낱낱이 파악하였고, 해치려는 자취도 분명한 증거가 있으니 어찌 뒷날이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신(臣)은 제주에 부임한 이래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식음을 폐하고 날을 보내면서 경영(經營)하고 계책을 짰습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일이겠습니까. 다만 사정에 어두운 서생(書生)으로 성품도 굳세고 용맹스럽지 못한데다 무사(武事 ; 싸움. 군사)에 관계된 일에는 사실 익숙하지 못해서 만일 사변(事變)이 창졸(倉卒)간에 발생한다면 한갓 공권(空拳 ; 빈 주먹)을 휘두를 뿐이니 어찌 위엄을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우국하는 신의 외로운 충절은 하늘이 밝게 아실 것입니다. 지난 1509 조선 중종 4년 기사년에 지모 있는 신하들이 조정에 가득하여서 해내(海內 ; 온 나라)가 평안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도 1510년 조선 중종 5년 경오년의 변이 생겼으니 누가 앞일을 미리 알 수가 있겠습니까. 당시 난(亂)이 일어났을 적에 1도(一道)의 힘을 다 모았어도 2읍(二邑 ; 고을)이 섬멸당하는 것을 구원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이겠습니까? 탄환(彈丸)보다도 작은 이곳에서 소리치며 사람을 부르고 애쓴다 한들 사방에 성원해 줄 이가 없으니, 힘이 떨어지고 기운이 다하여 앉은 채로 어육(魚肉)이 될 터인데, 이 또한 반드시 닥칠 사세입니다. 천하(天下)의 일이란 목전(目前)에 밝게 보이는 것은 처리하기 쉽고, 생각지도 않은 곳에 숨어 있는 것은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어려운 일은 느슨해지기 쉽고, 느슨해진다면 사람들이 소홀히 하기 십상이니 소홀히 하는데도 사변이 일어나지 않은 적은 고금을 통해 있지 않습니다. 신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발탁되어 무거운 임무를 맡은 이래로 눈으로 보고 몸으로 부딪친 바라 걱정스러운 마음 가눌 수 없으며 백성들은 화가 닥칠 것 같아 불안을 떨고 있습니다. 멀리서 외로운 성(城)을 지키면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1596년 조선 선조 29년 12월 21일 계미, 통신사(通信使)가 일본국(日本國)에서 돌아와 올린 서계(書啓)에서, 조신(調信)이 또 말하기를, “일본인(日本人)이 탐라(耽羅)에 좋은 말이 있다는 것을 듣고 오래전부터 가서 약탈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으니, 지금은 우선 전라(全羅 ; 전라도)를 침범하고, 다음에 탐라를 취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600년 조선 선조 33년 8월 11일 신사, 비변사(備邊司)가 아뢰기를, “임금께서, “제주는 절도(絶島 ; 외딴 섬)이므로 설사 범람(泛濫)한 일이 생기더라도 조정(朝廷)에서는 들을 길이 없으니 판관(判官)은 문관(文官)으로 차송(差送)하는 것이 좋겠다. 비변사로 하여금 의계(議啓)하도록 하라”라는 것으로 전교(傳敎)하셨습니다. 제주는 큰 바다 가운데에 있으므로 목사(牧使)와 판관을 으레 무변(武弁)으로 차견하였으므로, 비록 법(法)에는 벗어나는 일이 있어도 조정에서는 알 길이 없어서 온 섬의 백성들의 마음을 근심과 원망으로 지내게 했었는데, 이번에 상교(上敎)를 받고 보니 매우 합당합니다. 앞으로 판관은 대간(臺諫)이나 시종(侍從) 중에서 각별(各別)히 가려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평소에 탐라(耽羅)에서 사람이 오면 내가 반드시 인견하여 물어보았는데, 그 사람들은 조인후(趙仁後)가 판관이 된 것을 극구 칭찬하면서, 책책(嘖嘖 ; 크게 더들다)하며 부인하기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으로 세간(世間 ; 인간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또 조인후가 한 정치는 운무(雲霧 ; 구름과 안개)가 걷히어 청천(靑天 ; 파란 하늘)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그 독한 안개 속에 빠진 지가 대체 이미 몇 년이나 되었겠는가. 이것으로써 조정의 문견(聞見 ; 귀와 눈)이 미치지 못하는 변비(邊鄙 ; 중앙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시골. 변두리) 외딴 섬에서는 배자(拜者 ; 제수 받은 자)가 제멋대로 범람한 짓을 하여도 백성들이 그 근심과 고통을 하소연할 곳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참으로 가엾다. 방어가 긴요한 곳에 번번이 문관을 보낼 수는 없더라도, 이따금 문관을 차견하여 이목(耳目 ; 귀와 눈)을 통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위(所謂 ; 이른바) 문관도 유(儒 ; 유가)의 이름을 띠면서 묵(墨 ; 묵가)의 행동을 하는 자가 혹 있으니, 만약 그 이름만을 가지고 취한다면 이 또한 나의 오늘의 뜻이 아니다. 계사(啓辭)로 인하여 아울러 언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성산관일 - 1702년(숙종 28) 7월 13일, 성산일출봉에서 해뜨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으로 일출봉과 우도의 지형이 자세하다. 일출봉 입구에 진해망(鎭海望)의 옛터가 표시되어 있고, 그 위로 일출봉의 정상에 있는 성산망까지 오르는 등정길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성산망’은 성산 위에 있었던 망(望:봉수)을 일컫는다. 각교(刻橋)는 ‘깎아 만든 다리’를 뜻하는데, 성산을 오르는 길이 험난하므로 암반에다 계단을 새겨 만든 듯 하다. 일출봉 앞 평지에는 봉천수가 있으며, 이곳에서 하마(下馬)하고 걸어서 성산망에 이르게 되어 있다. © TIN 뉴스


1601년 조선 선조 34년 5월 11일 무신, 임금이 비밀(祕密) 비망기(備忘記)로 전교하기를, “경견(頃見 ; 지난 번)에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해온 사람의 말을 듣건대, 대마도(對馬島)의 왜적(倭賊)이 장차 제주(濟州)를 도모하려고 한다는 등등의 말을 하였다. 비록 그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일이 있기 전에 먼저 도모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는 것이요, 그 말이 맞지 않으면 나라의 복(福)인 것이다. 만일(萬一) 제주에 적변(賊變)이 있게 되면 그 형세가 지탱하기 어렵다. 혹시 불행(不幸)하게도 적이 탐라(耽羅)를 점거하여 소혈(巢穴 ; 소굴)로 삼는다면 다른 날 말할 수 없는 일이 있게 된다. 비록 제주가 바다 가운데 있는 1도서(一島嶼 ; 섬들)이긴 하지만 천하(天下)의 안위(安危)가 여기에 달려 있다. 전일(前日) 내가 구례(舊例)에 따라 병사를 더 들여보내려고 했는데 사세(事勢)가 어렵다고 하였었다. 이제 허실간(虛實間)에 성식(聲息)이 그러하고, 심지어 추자도(楸子島) 근처(近處)에 적선(賊船)이 다시 출몰(出沒)한다고 하니, 헤아리기 어려운 정세가 있을까 염려된다. 본주(本州)의 방비 상황 역시 어떤지 알 수가 없어 나는 대단히 은우(隱憂 ; 우려)하고 있다. 제주에 대해 따로 특별히 조치할 일을 비변사에 일러서 의논해 조처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다음호에 ‘탐라(제주)의… ⑥’가 이어집니다.

 

▲ ©TIN 뉴스

 

  

박원호 TINNEWS 논설위원
(재)섬유패션정책연구원 사무국장

whpark@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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